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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유재원의 그리스코드] 4. -별을 보다 개천에 빠진 철학자-
글쓴이 장소담 첨부파일 -
작성일 2013-06-25 오후 12:10:34 조회수 2252

별을 보다 개천에 빠진 철학자
 

저녁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은 왜 이 시각에는 하늘이 붉어지는지 묻지 않는다. 다만 에스페리데스(저녁의 여신들)의 피부가 장미빛이기 때문이라고 믿을 뿐이다. 그러나 과학도는 푸른 하늘이 붉은빛으로 바뀌는 까닭을 알아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진실을 말한 것일까?

그리스인들은 이런 두 태도를 미토스(mythos)’로고스(logos)’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가 미토스이고 인과율에 의해 지배를 받는 이성의 세계가 로고스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나 소설을 비롯한 문학의 줄거리, 신화는 모두가 미토스이다. 미토스는 상대방이 그 말을 믿건 안 믿건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아름답고 진실인 듯하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믿어 보고 싶어 받아들인다. 반면 로고스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논리적으로 옳고 증명이 가능할 때에만 진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 말이 로고스다. 그리스인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로고스의 세계를 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동양과 서양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우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처음 물은 사람은 이오니아의 도시 국가 밀레토스 출신 탈레스(Thales 기원전 640-550)였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물은 다른 모든 것의 변화의 원인이지만 스스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근본적 원리라는 것이다.

이 주장이 현대인들에게는 황당하게 보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물질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를 물질 자체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이런 태도는 세계의 모든 원리를 초자연적인 힘의 활동이나 개입에 의해 설명하려 했던 이전 시대의 자연관과의 결별을 가져왔다.

탈레스는 기원전 585 5 28일에 있을 일식을 정확하게 예견했다. 이 사건은 신화적 태도에서 과학적 태도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였다. 이로써 인간은 더 이상 천둥이나 우레, 번개와 같은 기후 현상이나 달의 차옴과 이지러짐, 계절의 변화, 천체의 운동을 신들의 조화로 여기지 않고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로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인간 이성에 대한 최초의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탈레스는 일식을 예견한 데 머물지 않고 닮은꼴을 이용하여 해안에서 바다에 있는 배까지의 거리를 재는가 하면 사람의 키와 그림자의 길이가 같아지는 순간에 피라미드의 그림자를 재어 피라미드의 높이를 알아내는 등,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여러 면에 적용했다.

이와 같이 인간 자신의 특수하고 독자적인 경험에서 알아낸 범주로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에 열중하던 탈레스는 어느 날 저녁 하늘의 별을 관찰하다가 길가 개천에 빠졌다. 이 사건으로 탈레스는 그의 노예였던 한 할머니에게서 제 발 밑 일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느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itetos)’에 나오는 이야기다. 최고의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일상적인 사소한 문제에 소홀하여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을 빗댄 이야기다.

실제로 한번은 어떤 사람이 탈레스가 그리스의 현명한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가난하게 사는 것을 비웃자 탈레스는 이에 대해 명쾌하고도 실질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답게 그는 다음해 올리브가 풍작일 것을 예견하고는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을 매점하여 큰 이득을 남겼다. 탈레스는 이런 방법으로 철학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부자가 될 수 있지만 다만 그런 일에 관심이 없어 가난하게 살 뿐임을 증명했다고 전해진다.

탈레스는 원래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그도 젊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따라 이집트로 간 탈레스는 돈 버는 일보다는 이집트의 앞선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데에 더 열심이었다. 그가 이집트 신관을 끈질기게 졸라 한 신전에 고대에서부터 전해오는 수학과 천문에 관한 책을 보게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런 이야기로 미뤄 보아 탈레스가 이집트에서 천문학과 수학을 배운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의 선배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지식을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하고 즐겼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가 바로 실용적 학문에서 순수 학문, 즉 철학이 갈라서는 출발점이었다. 지식이 지식을 위해 봉사할 때 시간과 공간, 수와 양, 무게와 크기, 연장과 단절, 물질과 정신, 운동과 진공과 같은 고도의 추상 개념들이 문제가 되고 논리와 체계가 필요해진다.

탈레스는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라 오직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에 지식을 찾고 생각하는 사람, 한마디로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 필로소포스(philosophos 철학자)의 최초의 모델로서 우뚝 솟은 인물이다. 현대 과학과 학문은 멀리는 모두 탈레스에게서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그는 겸손했다. 뒷날 델포이 신전에 새겨져 유명해진 경구 네 자신을 알라도 그가 처음 쓴 말이라 한다. 그는 또 자신의 삶에 대해 대단한 긍지를 느껴 자신이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야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을 신들에게 감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 밀레토스는 오늘날 폐허 속에 놓여 있다. 겨울에 이곳을 찾으면 물웅덩이 때문에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다. 차에서 내려 서성거려야 어디선가 유적지 표를 파는 직원이 나타날 정도로 찾는 이들도 많지 않다. 세속적 가치와 현세의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던 위대한 철학자가 그 옛날 거닐었을 법한 극장 회랑에서 인간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