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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유재원의 그리스코드] 3. -헤시오도스, 6천의 신과 영웅들을 하나의 족보로 묶다-
글쓴이 장소담 첨부파일 -
작성일 2013-06-17 오후 4:08:37 조회수 1930

헤시오도스, 6천의 신과 영웅들을 하나의 족보로 묶다
 
호메로스가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던 시절, 소아시아의 키메 시 출신인 한 뱃사람이 실패만 안겨주는 바다에 싫증을 내고 그리스 본토의 보이오티아 지방의 도시국가 아스크라로 이주하여 목축과 농사로 삶을 꾸려 나갔다. 아스크라의 삶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그의 아들 헤시오도스는 어느 날 헬리온 산에서 양들을 돌보고 있을 때, 음악과 시의 여신인 무사이들에게서 노래하는 재주를 전수 받았다. 그리고 영감에 싸여 우주 창조부터 신들의 탄생과 권력 투쟁, 인간의 탄생에 대해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혼돈[Chaos]만이 있었다. 이어서
대지 어머니 가이아(Gaia)와 영원한 지하 감옥 타르타로스(Tartaros)와 만물을 서로 결합하게 하는 힘을 가진 에로스(Eros)가 생겨났다. 혼돈에서부터 어둠과 밤이 태어났고 밤과 어둠은 서로 어울려 대기와 낮, 파멸, 운명, 죽음, , 꿈들이 태어났다. 밤은 또 홀로 책망과 불운, 운명, 복수, 허위, 우정, 노화, 불화를 낳았다. 그리고 불화로부터 고통, 살인, 고민, 불행이 태어났다.

한편 가이아는 홀로 우라노스(Ouranos 하늘)와 바다, , 시간을 만들고는 우라노스와 어울려 티탄족을 낳았다. 티탄족의 막내 크로노스(Kronos)는 어머니 가이아의 사주를 받고 아버지 우라노스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자신의 아들 제우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타르타로스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제우스는 가이아가 보낸 거인족들과의 싸움과 타이폰과의 대결에서 모두 이겨 우주의 권좌를 확고히 했다.

이렇게 천지 창조에서부터 올림포스의 신들이 패권을 잡기까지 우주가 겪었던 이야기들을 적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 신통기(神統記 Theogonia)’는 지루하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세상 삼라만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인간의 본성과 복잡한 사회의 특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을 찾는 진지함이 배여 있다. 그는 자연을 다루는 농부의 눈으로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고 생명의 기원은 무엇이며 인간들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노래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 안다는 것은 태초에 어떤 신들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떤 일들을 했는가를 아는 일이다. 이런 작업은 신들의 계보(系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신들뿐 아니라 대기, 광명, , 낮 등과 같은 천체 현상들과 바다, , 강과 같은 자연물들은 물론 파멸, 운명, 죽음, , 책망, 질투, 불운, 행운, 사랑, 증오, 허영과 같은 추상 개념들까지도 모두 하나의 계보로 묶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 주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왜 지금과 같은 특성을 갖게 되었는가를 이런 신들과의 관계 아래서 설명했다. 이로써 인류에게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낯선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체계로 변했다.

헤시오도스의 영향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신화의 각 인물들이 각기 고유한 이름과 족보를 가지고 등장함에 따라 그전까지는 각기 독립적이고 일회적이었던 개개의 설화들이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맺는 통일체로 발전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뒤세이아도 이런 체계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며 이아손을 중심으로 한 50명의 그리스 영웅들이 황금의 양털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그린 아르고스 원정대 이야기나 멜리아그로스와 아틀란테를 비롯한 또 다른 50명의 영웅들이 벌이는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의 족보 가운데 오이디푸스 왕과 그의 딸 안티고네로 대표되는 테바이의 라브다코스 가계의 비극과 아가벰논과 그의 처 클뤼다임네스트라, 그들 사이의 아들 오레스테스로 이어지는 미케네의 아트레우스 가계의 비극은 후대의 삼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뤼피데스의 손에 의해 널리 알려진다.

그리스 신화 전체에 나오는 인물의 수는 자그마치 6,000명에 달하지만 이들은 정교한 족보에 의해 여러 친족 집단으로 나뉘어 있고, 또 이 친족 집단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거대한 사회를 형성한다. 이러한 신들과 영웅들로 이루어진 사회 조직은 다른 민족의 신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단순한 민담이나 설화 형태였던 이야기들이 거대한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서사 체계를 갖는 그리스 신화로 발전하게 된 밑바탕에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가 놓여 있었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신들의 족보가 이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호메로스가 인간 영웅을 그리면서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인생관을 보여 주었다면 헤시오도스는 인간이 신이나 기타 정령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미지의 것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점에서 호메로스가 예술가였다면 헤시오도스는 영감에 가득 찬 샤먼이었다.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가진 귀족 취향의 호메로스와 감성적이고 종교적 경향을 가진 서민 취향의 헤시오도스, 이 두 사람의 작품 세계는 서로를 보완하며 이미 서양 문학 요람기에 서양 문학이 가야 할 길을 굵은 선으로 그어 놓았다.